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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 일의 미래/인공지능 지질학 우주학 에너지

우주학 화성 레울 발리스

우주학 화성 | 레울 발리스

남위 42.6도 동경 104.1도

 

 

레울 발리스는 길이가 1,5000킬로미터를 넘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협곡으로 화성 남반구의 고지대인 프로메테이 테라를 관통한다. 지형으로 볼 때 레울 발리스를 형성한 요인은 급작스러운 대홍수보다는 오랜 세월 강물이 흐르면서 일어난 침식작용으로 추정된다. 즉, 너른 고지대에서 흘러온 강물이 서쪽 끝에 있는 헬라스 불지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침식된 지형일 것이다. 그 길이를 따라 수 많은 지류가 있으며, 다양한 지점에서 협곡 지대와 합류한다. 이 협곡의 구불구불한 경로가 갑자기 발생한 대홍수에 의해 침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이 지표면을 흐르는데 필요한 조건과 이 지역에 만들어진 크레이터의 숫자를 따져볼 때 레울 발리스는 헤스페리안 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정되는 지형도 있어 눈길을 끈다. 협곡 바닥 여기저기에 파인 세로 모양의 홈은 협곡을 따라 이동한 빙하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빙하작용의 흔적은 이러한 중위도 고지대에서는 곳곳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그 근처의 크레이터에도 레울 발리스와 비슷한 세로 홈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빙하 자체도 '귓불형 충적선상지'의 형태로 지하 곳곳에 숨어 있다.

 

우주학 화성 | 화성 탐사

 

화성 토양에 발을 내디딘 인간 탐험가는 아직 없다. 그대신 무인 우주 탐사선이 화성으로 발사되었다.

궤도 위성, 지표면 실험실, 용감무쌍한 탐사 로봇이 풍부한 정보를 지구로 전송함에 따라 화성에 대한 지구인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직접 화성으로 가야할 날을 위한 길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우주학 화성 | 초기 탐사선

 

붉은색 행성이 내뿜은 매력 덕분에 화성은 1950년대 후반 우주 시대의 동이 트자마자 탐사 대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우주 시대 초기의 화성 탐사 계획은 좌절되거나 실패로 끝나는 일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탐사선이 화성 궤도로 진입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우주 경쟁의 초반부는 각 나라의 로켓기술이 어떠한 특성을 띠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었다. 로켓은 주로 핵미사일과 대륙을 오갈 수 있는 무기를 발사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소형 탄두 기술을 보유한 미국은 상대적으로 작은 미사일을 쏘아 올릴 수 밖에 없어 유인 캡슐을 궤도에 올리거나 좀 더 큰 우주 탐사선을 궤도 너머 태양계로 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련의 탄두는 좀 더 투박하고 무거워서 미사일도 버러야만 했다. 그 때문에 초반부터 소련의 미사일은 무인 탐사선을 달과 가까운 행성으로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몰니야 로켓에 실려야 했다.

따라서, 화성 탐사를 처음으로 시도한 나라는 소련인데, 초기에는 실패와 실망스러운 결과가 계속되었다. 1960년 발사된 마스 1M 1,2호 모두 지구 궤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파괴되었다. 탐사선을 화성으로 추진시켜야 하는 로켓 상부가 작동 불능에 빠졌기 때문이다. 소련은 2년 후 다시 층이 되었을 때, 즉 화성과 지구가 가장 가까워졌을 때 재차 도전했지만 더 큰 실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탐사선인 마스 1호는 발사 후 화성으로부터 19만 3천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지구로부터 1억 700만 킬로미터 정도를 날아가 화성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서 교신이 두절되었다. 같은 해 근점 비행과 착륙을 목적으로 탐사선이 두차례 더 발사되었으나 발사 직후에 폭팔하거나 지구 궤도를 벗어나는데 실패했다.

1964년이 되자 미국의 로켓 기술은 NASA가 독자적인 화성 임무를 계획할 정도로 발전했다. NASA는 2년마다 찾아오는 발사 시간대에 쌍둥이처럼 똑같은 우주 탐사선 한쌍을 발사한다는 전략을 세웠고, 곧바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미국 최초의 탐사선인 마리너 3호는 1964년 11월 초 발사에 실패한 반면 쌍둥이로 제작된 마니러 4호는 그로부터 3주 후에 발사에 성공했고 1965년 7월 화성을 근접하는 비행을 하는 동안 지구와 교신을 유지했다. 마리너 4호는 다른 행성을 최초로 근접 촬영하고 전송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남부 고지대 위를 비행할 때 촬영되었다. 그런 탓에 화성이 달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크레이터로 덮여 있다는 고정관념을 바꾸어 놓지 못하고 오히려 그릇된 인상만 심어주었다. 그외에도 마리너 4호는 목표물의 9,846킬로미터 이내로 접근하여 화성 지표면의 온도와 자기장을 측정하고 그 결과를 전송했다. 한편 소련은 1964년 발사 시간대에 또 다시 두대의 탐사선을 잃었다.

NASA가 1969년  같은 시간대에 보낸 두 대의 탐사선도 화성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우연히 크레이터로 뒤덮인 남반구 고지대를 비행하면서 몇장의 사진을 전송했다. 1971년 발사 시간대에 궤도 탐사선을 띄우는 것이 그 다음 순서임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이번에도 쌍둥이 탐사선을 만드는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리너 8호는 발사에 실패했지만 마리너 9호는 1971년 5월 플로리다 주 캐이프 캐너버럴에서 성공적으로 이륙했다. 그런 후 11월 14일에 화성 궤도에 진입함으로써 다른 해성의 궤도에 들어선 최초의 우주선이 되었다.

마리너 9호에 실린 과학장비는 요즘 기준으로는 투박할지 몰라도 화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고배율이라 선명한 화질은 기대할 수 없지만 전에 비해 크게 개선된 지표면 관찰용 카메라와 지표면 광물의 조성을 분석할 수 있는 적외선과 자외선 분광기가 실렸다. 잘 알려졌다시피 마리너 9호는 대형 먼지 폭풍이 불 때 화성에 도착 했다. 그 때문에 과학 임무가 몇달이나 늦춰졌다. 먼지 폭풍이 차츰 진정됨에 따라 흐릿한 먼지 사이로 처음 보인 지형은 올림푸스 몬스의 봉우리들과 타르시스 고원의 화산들이었다.

1972년 내내 마리너 9호는 크레이터가 많은 남부 고지대를 벗어나 좀 더 복잡한 지역을 사진으로 찍어 전송했다. 그 사진들에는 고대에 강이 있던 지역과 발레스 마리네리스 협곡 지대는 물론 화성 대기에 떠 있는 구름 등이 담겨 있었다. 사진에 담긴 건조하고 추워봉는 화성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임무 잧는 과학과 기술 측면에서 크나큰 성공이었으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훨씬 더 과감한 후속 임무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