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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알쓸신잡

갈릴레오 망원경 그리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 1

갈릴레오 망원경 그리고 지동설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갈릴레오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의 최애캐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탈리아 피렌체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일 뿐 아니라

실제 김진애 박사의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오의 실제 거주지였던 터라 두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보니

갈릴레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춘추 전국시대를 방불케하는 이탈리아의 여러 공국들의 세계사적인 일은 읽다보니 머리아프고

망원경에 얽힌 갈릴레오의 처절한 삶을 읽다보니 과연 진실이 언제나 처음부터 환영받는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갈릴레오와 망원경


연구자로서 명성을 높여가던 갈릴레오는 1588년 볼로냐 대학교 교수직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9년 로마 예수회의 도움으로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임용된다.

25세의 나이에 독학으로 대학 교수가 되었으니 그 재능과 열정이 얼마나 뛰어난가!

당시 수학자는 요즘 수학자와 달리 선박과 병기 제작 성쌓기에 쓰는 도르래, 굴램대 같은 기계의 성능을 개선하는 실용 연구에도 큰 활용을 했다. 갈릴레오는 수학을 가르치면서도 물리학에서 다루는 운동 에너지 이론도 함께 연구했다. 

갈릴레오가 죽은 뒤에 그가 피사 사탑에서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자유 낙하 실험을 했다고 전한다. (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갈릴레오는 1592년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베네치아 공국의 파도바 대학교 교수로 임용된다.




1609년부터 갈릴레오의 삶은 극적으로 바뀐다.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망원경이 있다.

망원경은 그 당시 귀족들의 장난감 정도였고, 배율도 낮았다.

갈릴레오는 당시로는 성능을 매우 높인 9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하여 베네치아 공국에 기능하였다.

파도바 대학교에서 그는 종신 교수로 임명받았고 사회적으로도 무척 성공한 학자가 되었다.

1609년에 갈릴레오는 약 20배율에 달하는 망원경을 만들었고, 천체 관측에 망원경을 활용했다.

그는 천체를 관측한 자료를 모아 1610년 "별들의 소식"을 출간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발견해 유명해진 목성을 모두 4개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발견 업적의 영예를 메디치 가문에 바쳤다. (메디치 가문은 그당시 토스카나 공국을 다스리던 최고 권력)

책을 바친 그 해에 그는 토스카나 대공의 전속 철학자 겸 수석 수학자 자리를 얻었다.

철학자라는 직합은 그당시 수학자보다 더 명망있고 학식깊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1610년 궁정의 권력자가 된 갈릴레오는 고향에서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 안정된 신분과 경제력을 지니며 하고 싶은 연구를 맘껏 할 수 있게 됐다. 부와 명예, 그리고 자유로운 연구는 갈릴레오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훨씬 더 큰 격동은 1632년 시작된 '갈릴레오 사건'으로 알려진 종교 재판이 시작된 시기였다.


'갈릴레오 사건'의 전주곡


갈릴레오가 문제작인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낸 것은 그의 나이 68세이던 1632년.

다음해인 1633년에 종교 재판소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퍼트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무기한 가택 연금이라는 벌이 내려졌다. 

그런데, 1633년의 재판으로 절정에 이른 이 '갈릴레오 사건'의 조짐은 사실 1616년 약식 재판 때 이미 시작됐다.

아니 좀더 정확히 알려면 망원경을 만들었던 1609년으로 가봐야 한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발견한 무렵부터 코페르니 쿠스 학설에 대한 신념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이미 피사 대학교와 파도바 대학교 교수 시절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알고 있었지만, 주된 관심사는 스스로 새로운 사실에 대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가르친 천문학도 근대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 고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에 가까운 천문학이었다.

그러던 그가 망원경으루 우주를 바라보면서 차츰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이야말로 참된 진리이며 참된 과학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망원경으로 본 우주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뒤집을 만한 여러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보는것이 믿는 것'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망원으로 우주를 보게 되면서,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설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망원경으로 본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에 기록된 내용과는 영 달랐기 때문이다.

천상계에서는 어떤 물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옛 자연 철학의 가르침과는 달리 태양 표면에서는 변화하는 흑점이 관찰되었고, 매끈하다는 달 표면도 울퉁불퉁해 지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또 목성 둘레를 도는 4 개의 위성을 발견했을 때 그것들은 마치 작은 행성계를 이루는 듯이 보였다. 금성, 화성을 비롯해 그의 망원경에 비친 천체들은 지구도 이런 여러 행상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일이 터졌다.

갈릴레오는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발표한 글에서, 성서와 신학에 근거를 두어 태양 중심설을 비판하는 여러 반론을 다시 반박했다. 이 글이 널리 읽히면서 논란이 일어났고 성직자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을 떄 갈릴레오의 '태양 흑점 서신'이란 책이 출간되었고, 이로서 이단 혐의까지 받게 된다. 이어 종교 재판소에서도 갈릴레오에 대한 이단 심사를 벌였다. 갈릴레오는 교황청에 불려 가 약식 종교 재판도 받았다.


다행히 종교 재판소가 1616년에 내린 이단 판정 목록에서 갈릴레오는 없었다.

금서가 된 코페르니쿠스의 책에 대해서는 출간 정지, 수정, 개정 명령이 내려졌다.

갈릴레오의 책은 금서가 되지 않았으나, '지구 운동을 진리로 믿거나 지지하거나 변화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당시 종교 재판소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양이 우주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직는 운동을 한다는 견해를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않을 것을 명령...이를 따르지 않으면 재판에 회부... 갈릴레오는 이런 지시를 받아들이고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다."


혹독한 정신적고초를 당한 과학자 갈릴레오는 이제 입을 다물고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그가 1632년 "두 우주체계의 대화"를 펴냄으로써 또다시 화두에 올랐다.

이를 통해 '공식 이단' 판정은 아니지만 그보다 한단계 낮은 '중대한 이단 혐의' 판정을 받고 무기한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